잡담

본고사와 4개의 취업 지원의 추억

EU-03 2017. 10. 2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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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기에 총 4개의 시험에 지원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결과물이 좋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선 맨 처음 넣었던SK 하이닉스의 경우 서류에서 분쇄당했을겁니다. 같이 낸 사람들이 저보다 20일 우선 통보를 받았을때 부터 아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삼천리ENS의 경우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아 이것도 아마 서류에서 분쇄당한듯 합니다.

현대 모비스에서 서류는 합격했지만 다른 면접과 겹처서 인적성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트랜스포테이션의 경우 서류는 합격, 인적성은 못봤는데도 합격, 반면 면접에서 너무 많이 나간듯하여 걱정했지만 어찌어찌해서 합격됬습니다.

혹시라도 내년에 비좁은 현대 진입을 위해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해 남겨둡니다.

 

우선 진로탐색 과정부터 간략하게 회고를 해볼까 합니다.

3-1학기 부터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고 다음과 같이 분류했습니다.

취직행/기시/변리사 중 하나를 하느냐, SPK를 따서 편하게 지내느냐, 아니면 마지막으로 석사후 유학도전 해서 학자의 길을 걷느냐 중 하나를 결정해얌나 했습니다.

 

원래 마지막 선택을 하고싶었지만 수업중에 미크로파 공학수업을 들으면서KoJar 책 예제도 풀이보고 겨우 이해하고 연습문제가 과제로 나오면 솔루션 배끼는것도 모자라 솔루션 풀이 자체도 이해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한학기 내내 KoJar 책 끼고 살았는데 여태까지 사실 3년동안 제가 뭔 과목때 뭘 공부했는지 기억이 안납니다. 주변에서는 절 무슨 안테나 정통 테크트리탄 학생으로 아는듯 하지만 실제 제가 아는건 없습니다.

 

아무튼 이 때 이후로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렸습니다.

첫번째의 경우 부모님도 월급 타며 살아 오셨지만 한계가 있어보여서 제외하게 되었고, SPK의 경우 첫번째 보다는 좀 낫겠지만 이 역시 고작 월급쟁이의 자식이기에 같은 맥락으로 제외하게 되었습니다아시다 싶이 20대 총선에서 민중연합당의 윤미연 후보는 자기 스스로 흙수저를 자처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논란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윤 후보는 홍보물에서 자신을흙수저 취준생(취업준비생)’으로 소개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실제로 신고한 재산을 약 9000만 원정도로 이미 25 1억을 모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걸레에 따르자면 그녀가 소속된 '민중연합당'은 원내 진입을 노리는 흙수저당과 노동자당, 그리고 농민당의 연합 정당으로 윤 후보는 흙수저당 소속이므로 그저 느낌만 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의미를 내비쳤습니다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돈 500만원 정도 밖에 없고, 학자금 2 8백만원 정도 남아있지만, 그녀의 경후에는 48백만 원은 예금 및 보험, 나머지 4천 만원의 경우 최소 중견 또는 중소기업금융채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실상 저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던 겁니다. 차라리 그녀처럼 돈이 많았다면 MD/P까지 고민하다가 변리사라도 준비했을텐데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제일 쉬운 Hirt를 선택하는 방향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사실상 학교에는 졸업장이라는 자격을 받기 위해 가고, 진학을 위한 실력이나 요령 같은 것은 과외에서 얻는다는 이런 말에도 아무런 분노나 저항을 느끼지 않는 우리 교육이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실제로 지금에서도 대학교는 한낱 요식을 갖추는 사관학교나 아카데미 같은 존재로 밀려나있지 않나 되살펴 봅니다. 1980년에대 어느 대학교 입학생의 면접에서 지금 이 합격의 기쁨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부분의 학생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과외 선생님에게 드리고 싶다라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합니다. 아마도 동아일보의 사설에서 나왔던 내용 같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4학년이 됬을때 휴학하게되었고 9월달과 10월달에 졸작 미리 먼저하고 우선 졸업이 가능하게만 해놨습니다. 사실 친구에게 시켰기에 크게 문제는 없었습니다. 11월과 12Seps 모의고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1월부터 본고사 준비를 했습니다

세상에 1980, 즉 우리 세대 30년 전에도 대학교라는 교육체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이유 또한 현재와 비슷했다는게 개그라면 개그겠지 말입니다. 공교육이 제공하는 일반 학교의 교육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것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넘기 힘든 대학교의 그 쇠창살 같은 문턱에는 본고사 라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때는 1980 7월이었습니다. 정부가 창안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공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을 실행시켜 본고사를 폐지하게 되었습니다. 본고사는 왜 폐지됐을까에 대한 원인은 뻔하지만 시나브로 2012학년도에 일부 대학에서 본고사를 부활 시키겠다고 공언하는 바람에 그 당시 본고사의 억눌리고 겁탈당한 역사를 가진 본고사 1세대라고 할수있는 70년대의 학번들이 이와 같은 비통한 현실에 소리를 질렀습니다.

 

때는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 모든 사회가 준전시 체제였기에 애초에 공교육이라는 학교는 별 소용도 없는 수업을 진행하는 것 이외에 온통 대학교 입학을 위한 본고사 대비를 위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홈룸 클라스라고 하는 아침 6시 반부터 1교시 전에 수업을 시작하는 마이너스 1교시 라는 이상한 수업도 존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연히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대학이 준비하는 본고사를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과 다를빠 없게 국어, 영어, 수학을 중심으로 국영수 체계가 유지되었는데,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보면 이것이야 말로 뭔가 잘못됬다고 동산문고에서 72년부터 화학을 가르치고는 했던 김덕창 선생께서는 참으로 가슴이 원통하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산대에 본고사 원서를 넣었을 때 제 스팩 수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선 어찌해서 서류는 합격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4배수 뽑는 서류합을 하고 면접을 갔다 왔습니다.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면접에서도 일반 자연계 전형 출신이 단 한명도 안왔습니다. 덕분에 뭘 물어봐도 비교당할 필요가 없었고, 긴장을 덜 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나이스를 외치면서 들어갑니다.

아마 고등학생 출신이라 수시납치를 우려해서 안온것 같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많이 미안했습니다. 사실 2013학년도 대입부터 수시모집에서 최초합격이든 추가합격을 불문하고 먼저 한 대학교 에서라도 합격이 나버리면 해당 대학교에 등록하는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정시모집에 지원하는 권한이 박탈되었습니다. 이처럼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대학 입학처에서는 왠만한 스팩을 가진 학생들을 다른 학교로 가지 못하고 미리 뽑아버리는, 이름바 수시 납치라고 일컷는 사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예시로 2015학년도에는 수능 만점자가 성균관대에 수시 합격해버린 바람에 수능에서 무려 만점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활용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여 그 수시 제출하러 갔다는 어머니가 땅을 치며 울었다는 사례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옵니다. 가장 재밌었던건 2016학년도에도 수능 만점자가 나타났고 2015년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수시 납치될 뻔했지만 어찌어찌 해서 어이없게 불합격 통보를 받아 정시모집으로 진학에 성공한 일례가 있었습니다.

 

대충 면접에 들어갔을때 면접관과 수험자의 비율은 4 1 이었습니다. 물어본 문제는 대부분 인성에 관련된 것이나 가족사에 관한 지극히 평이한 것들이었습니다애초에 면접실에 앉았을때 앞에 놓인 책상위에는 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긴장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해당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써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번 질문은 평소에 활용하는 매체에 관련한 내용이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책,만화책 혹은 영화에서 좋아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 이유를 쓰는 것이었는데 사실 만화나 이런걸 잘 보지 않았고, 또 나이대가 있는 면접관들이라서 그렇게 새로운 캐릭터를 쓰기도 뭐 했습니다.

2번에서는 그 반대로 싫어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 이유를 써라는 아주 뒤통수를 가격하는 문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 역시 나이대를 고려하여 프리져라고 쓴것 같습니다.

마지막이었던 3번 문제를 보고 대체 문제 출제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었습니다. 3번 문제는 바로 돌아가고 싶은 시절에 대해 서술하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좀 말도안되는 내용들에 대해서 1분정도 생각하고 순서대로 답변하면 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웃기게도 여기에 대한 면접관의 피드백은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됬지만 이것은 그냥 아이스브레킹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위의 대답을 빠르게 끝내고나면야 비로서 자소서 기반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예상대로였지만 애초에 그럴꺼면 앞선 문제를 왜 굳이 써놓기 까지 한건지 이해가 안갔습니다.

전자공학이 사이버네틱스에 어떤 기여를 할 것 같은가에 육대강 사업과 같은 이상한 행위는 없을 것이다라고 쓴것 같습니다. 특별히 재밌었던 학기가 있었나라는 질문에는 휴학시절이 그립다고 하려다가 본고사 시즌을 생각해내서 눈물을 자아냈습니다. 그동안 수강했던 과목들을 나열해 보라는 질문에 역시 국영수 위주의 든든한 생활이 좋다는 둥 시큰둥한 발언을 통해 필드를 장악했습니다. 성적을 보시더니 학부생활을 여부를 물으시는데 아마도 인적 사항을 점검하는 듯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괴상한 면접을 마치고 2학기 복학을 하였습니다. 합격 여부는 몰랐기에 불합격을 대비해 취준도 준비하다가 어찌되서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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